누가 보든 말든 때 되어 빛깔대로 피어나는 일은 노역입니다. 궂은 날씨를 다 견뎌야 합니다. 상처가 또 다른 이름의 꽃이듯, 꽃은 또 다른 이름의 상처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힘 닿는 대로 꽃잎 벌린 봄꽃 한 송이는 봄 전체 무게만큼 무겁습니다. 그 봄꽃이 청정바다에 활짝 피었습니다. 남해의 봄입니다.

남해의 봄은 울긋불긋 물든 관광지 들녘이 안중에 없습니다. 도통 봄 관능을 도발할 줄 모릅니다. 섬마을은 그저 봄 질감으로 따뜻하고 순박합니다. 숨 막힐 듯 꽉 찬 군락미도 제 것이 아닙니다. 바다 위 점점이 떠있는 섬을 닮아 봄꽃은 점점이 만개할 뿐입니다.

갯내음보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꽃향기가 더 진득한 섬, 섬 한바퀴 드라이브를 떠났습니다. 쉬어가듯 달리면 '복숭아꽃 살구꽃 핀' 언제나 그리운 '고향의 봄'을 만날 테죠.

■원예예술촌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사천IC를 빠져나와 창선·삼천포대교를 지나면 유채밭입니다. 삼원색이 봄을 그렸습니다. 붉은 교량, 샛노란 꽃잎, 푸른 바다. 한 점 수채화입니다. 비 갠 뒤라 먼 산이 안개를 뿜었지만 교량만 살짝 가릴 뿐 삼원색은 선명했습니다.

삼동면 원예예술촌까지 가는 해안 길섶에 빨간 무덤이 이어집니다. 춘삼월 알렸던 동백꽃이 허망하게 낙화했습니다. 동백꽃은 네 것 내 것이 참으로 분명합니다. 죽음을 제 나무 그늘 밑에서만 맞습니다. 옆 나무로 침범하는 법이 없습니다. 툭하고 수직낙화해 내년 봄을 기다립니다.

독일 마을 위쪽에 위치한 원예예술촌은 한국손바닥정원연구회 원예인들이 주축이 돼 2009년 개장했습니다. 원예를 테마로 조성한 마을입니다. 예술촌의 산증인인 탤런트 맹호림 씨는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이 가꾼 정원을 관광지로 활용하는 장소는 여기뿐"이란다. 개인주택 21채에 딸린 정원이 집주인 성향 따라 저마다 주제를 가졌습니다. 프랑스, 조각, 풍차, 풀꽃지붕, 석부작 식입니다.

예술촌엔 온갖 꽃들이 조잘댔습니다. 꽃잎이 크고 화려한 아네모네, 앙증맞은 팬지, 새초롬한 튤립, 가녀린 수선화, 화사한 진달래, 고운 복사꽃…. 종류를 셀 수 없습니다.

채소정원에서 발길이 잡혔습니다. 우물 옆에 핀 저 꽃 이름이 뭐죠? 동네 처녀 바람난 우물가 옆에 있던 꽃입니다. 앵두꽃? 맞아요. 안내원의 설명입니다. 앵두꽃은 연분홍 꽃받침을 가진 하얗고 작은 꽃입니다. 매화와 비슷합니다. 꽃받침이 꽃잎을 싸고 있는 게 매화, 뒤집어진 게 앵두꽃이란다. 혹자는 꽃이 우아하다 했습니다. 그러나 기자 눈엔 적당히 단아하고 적당히 수더분한 꽃입니다. 매화의 기품이 없어도 충분히 어여쁜 동네꽃이었습니다. 흔한 꽃이어서일까요. 공교롭게 이틀 뒤 장안사 근처에 있는 지인의 시골집에서 그 꽃을 또 봤습니다. 바람이 이슬비 맞은 앵두꽃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보는 마음이 살랑살랑 흔들립니다. 봄바람은 이런 겝니다.

■장평소류지 가는 길

원예예술촌 밑 해안 길은 물미해안도로입니다. '아홉 등 아홉 굽이 길'로 불립니다. 갯바람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흐르고 고개 넘을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달려듭니다. 지루하지 않고 아름다운 이 도로에서 많은 시인이 영감을 얻었습니다. '(전략)삼십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길은 잘 익은 햇살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후략).' 고두현 시인의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섬을 돌다보면, 말안장 형상인 마안도, 팥 모양인 팥섬이 망망대해의 심심함을 달랩니다.

미조면 초전마을에서는 튤립단지를 만났습니다. 단지라지만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올 초에 장평소류지에 있던 튤립을 여기로 옮겼습니다. 유채꽃에 둘러싸인 튤립이 아직 덜 폈습니다. 4월 초면 볼 만하겠습니다.

상주은모래비치와 다랭이 논 유채꽃밭이 장관인 두모마을을 지나 이동면 농업기술센터 앞에 차를 세웁니다. 장평소류지입니다. 소류지 일대는 남해에서 제법 큰 들에 속합니다. 그러니 농업용수가 필요했을 터. 소류지를 빙 둘러싼 개나리 꽃무리와 고목 30여 그루에 핀 벚꽃이 인상적입니다. 그 사잇길은 온통 노랗고 하얀 세상입니다. 소류지의 잔잔한 물결 위에 내려앉은 개나리꽃의 반영을 보다 잠시 시간을 빼앗겼습니다.

■남해대교 가는 길

남해대교 길에 들어서면 길 따라 꽃천지입니다. 모천, 문항, 남양, 문의, 왕지마을을 쭉 달리면 벚꽃은 원 없이 보게 됩니다.

남해군 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인 문항마을엔 3·1독립운동발상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거기 조금 못 가서 엽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강진만, 벚꽃, 유채꽃, 진달래꽃이 한데 어울려 지나던 차량을 붙듭니다. 문항마을 지나면 남해 꽃 구경은 절정을 맞습니다. 길 양옆 벚꽃이 하늘을 하얗게 덮었습니다. 꽃터널은 남해대교까지 계속됩니다.

남해는 남해찬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을 지은 자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습니다. 13년 남해 유배생활 중 이곳에서 상당한 기간을 보냈습니다. 저 멀리로 내침을 당해 아픔이 깊었을 터. 그래도 선생은 '꽃밭(화전)'을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남해 한 바퀴를 돌다보면 나도 모르게 "花~ 좋구나" 연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