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란 바닷물이 빠질 때 드러난 갯벌이나 바위 틈에서 패류, 해초류 등을 채취하는 일을 뜻하는 남해 지역의 토속어. 대량 채취가 아닌 일용에 필요한 양만큼만 채취하는 것이 '바래'입니다. '바래길'은 남해 지역의 여인들이 호미를 들고 갯벌로 나가 해조류 등을 캐오던 그 길입니다.

남해는 예로부터 서쪽의 여수와 동쪽의 거제에 비해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았습니다. 여수야 '여수에서 돈 자랑 하지 말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고. 거제 역시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거의 대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남해는 '똥배 기질' 하나로 억척같이 삶을 이어왔습니다. 여수까지 바다를 건너 거름으로 사용할 분뇨를 수거해 오던 그 '똥배'입니다.

남해 사람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바다가 열리는 물때에 맞춰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바래길은 남해인들에게 고단했던 삶의 길인 동시에 보물이 가득한 고마운 길입니다.

제1코스는 '다랭이 지겟길'로 불리는 코스입니다. 남해군 남면의 평산항에서 사촌해수욕장을 거쳐 가천다랭이마을로 이어지는 16㎞의 해안길입니다. 평산항 인근 조그만 골목길 어귀 길바닥에 노란색 라커로 화살표시와 함께 '바래길'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담벼락 위로 작은 표지판. 출발점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아직 정비가 많이 필요한 부분이죠. 실망은 이릅니다. 출발 후 5분이면 푸른 바다가 펼쳐집니다. 숲이 아니라 밭 사이로 난 길이라서 시야를 가리는 것도 없습니다. 시야를 가리는 게 없으니 바람을 막을 것도 없습니다.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바다의 싱그러운 짠내를 그대로 전해 줍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내내 지리산은 아무 말도 없이 옆을 지켜줬습니다. 여기 바래길은 줄곧 남해 바다를 담고 이어집니다. 바다는 든든하다기보다 포근하면서도 아련합니다. 그것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노스탤지어입니다. 언덕이라고 해 봐야 그다지 높지도 않습니다. 그저 사부작사부작 걸으면 어느새 언덕바지를 넘습니다.

길은 언덕과 해변을 반복하다 사촌마을로 이어집니다. 여름철이면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 여름이 지난 지금은 모래사장에 남은 발자국만이 여름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 발자국이 여름 것은 아닐진대, 감상에 젖은 착각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사촌마을의 옛 이름은 '모래치'. 사실 우리에게 모래해변은 당연하지만, 남해에서는 모래보다 몽돌해변이 더 익숙합니다. 몽돌해변에 찰싹이는 바닷물 소리는 모래해변과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고? 정말 다른데, 모 건강식품회사 대표의 말처럼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길은 두세 번 몽돌해변을 통과합니다.

사실 걷기에는 몽돌해변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발 아래로 '잘그락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마냥 예뻐서 괜히 종종거리게 됩니다. 몽돌해변으로 유명한 선구마을을 지나면 바다를 잠시 벗어납니다. 물론 고개를 돌리면 뒤로는 바다가 여전합니다.

하지만 앞만 보고 걷는다면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는 풍경. 축사의 소 한 마리가 벽 사이로 난 구멍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두리번거립니다. 색색의 등산복을 갖춰입은 낯선 이방인들이 궁금한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는 녀석도 바다가 보고픈 겔겁니다.

이후 한 시간가량 포장도로 갓길을 걷습니다. 아스팔트길이라 조금 섭섭하지만,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바다 위로 햇살이 부서지는 장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예전 자동차 차창 사이로 스쳐 지나갔던 그 풍경이, 걸으며 찬찬히 톺아보니 너무나 다릅니다.

가천 다랭이마을에 도착했습니다. 평산항을 출발한 지 꼭 5시간 만입니다. 중간에 식사하고 쉰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 걸은 시간은 4시간이 조금 넘겠습니다. 오래간만의 걷기인지라 발바닥이 얼얼하다. 매번 걸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얼얼함이 묘하게 기분 좋습니다. 정말 좋은데, 이 역시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그만하라고? 인정.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입니다.

다랭이마을은 바래길 걷기가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남해의 명소. 손바닥만큼 작은 논배미(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 하나하나의 구역)들이 산에 계단을 만듭니다. 삿갓배미라고 했던가? 옛날 한 농부가 자신의 논배미를 아무리 세어도 하나가 모자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중 땅바닥에 놓인 삿갓을 들었더니 그 속에 모자랐던 논배미 하나가 들어있더란다. 그 정도로 작은 논배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곳 다랭이마을의 논배미를 보면 그런 농담이 나올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논에 물이 차있다면 두둑의 경계가 뚜렷해 다랑논의 전경이 두드러질 텐데, 수확철이 지난지라 사진에서 보는 것만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한 해만 농사 짓고 말 것도 아니고, 내년 봄이 되면 다시 논에는 물이 찰 테니까요. 아마도 그때쯤이면 남해 바다를 건너는 봄 소식을 듣기 위해 다시 바래길을 걸어 이곳을 찾으리라.

<<바래길, 그밖의 코스>>

지난 5월 문화체육관광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10곳 중 하나로 선정된 바래길 제1코스는 '다랭이 지겟길'을 포함해 모두 네 개의 코스(총 길이 55㎞)로 이뤄집니다.

제2코스 '말밥굽길'은 지족마을~창선교~장포항~적량성의 15㎞ 구간(5시간 소요). 빼어난 창선 해안선과 해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어촌마을들의 인심과 맛을 느끼며, 말발굽 모양의 지형과 적량성터를 통하여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3코스는 적량성~공룡발자국화석~고사리밭~동대만 휴게소로 이어지는 14㎞ 구간(4시간 30분 소요)의 '고사리밭길'. 고사리 산지로 유명한 창선도의 정취를 느끼고, 산과 밭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진 고사리밭 길을 통해 아름다운 해안과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0㎞ 거리(3시간 소요)의 제4코스 '동대만 진지리길'은 동대만휴게소~당항항~냉천마을~창선,삼천포대교로 이어지며, 갯벌체험 등을 통해 자연을 배우고 창선,삼천포대교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직 네 개의 코스 모두 정비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 그중 제1코스인 '다랭이 지겟길'이 그나마 빠르게 정비를 추진 중입니다. 바래길 초행자는 우선 1코스부터 걸어보기를 권합니다. 갈래길마다 노란색 라커로 써놓은 화살표시나 '바래길' 깃발이 여행자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해 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