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리는 3월 중순 어느날, 나는 이웃마을 하동 섬진강에 있었습니다.

봄은 강가로 오는듯 했습니다. 어제 봄 햇살에 섬진강변 마을에는 벌써 매화꽃이 화사한 첫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저녁 설거지 마친 어머니가 풀어놓은, 맑은 물색 허리띠처럼 굽이굽이 정겨운 강줄기가 따스한 볕살에 안겨드는 섬진강, 애써 몸을 사리며 살짝 속을 보여주는 홍매화, 백매화가 쌀가루 하얗게 덮어쓴 산자락 비탈에 붉은 팥 흩뿌려 놓은 듯 눈을 어지럽히는 황홀경이 곧 눈 앞에 펼쳐질 것같습니다.

얕은 바람결 따라 이리저리 휘저으며 오르는 물안개는 그 어느 화선(畵仙)의 섬세한 필선(筆線)도 감히 흉내내지 못하는 자연의 신묘한 운치를 그려냅니다. 거기엔 한 점 거치른 것이 없고 한 가닥 꾸밈이 없고 어느 한 자락 뚜렷한 경계가 없습니다. 슬며시 스치듯 집적이며 어울리고 안아주는 아스라한 그리움이 있을 뿐입니다.

도란도란 속삭이다 쉴 새 없이 끄적이고, 어느새 늠실늠실 넌출대는 물결에 넉넉히 곁을 내주는 둔덕과, 그 어깨를 기품있게 높여주는 듬직한 느티나무,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는 외로운 나룻배 하나, 물가의 갖가지 야생초들….  어릴 적 졸음을 불러오던 아낙네들의 빨래터 방망이질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 귀가 밝아지고, 강 건너 산기슭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막 삶아낸 라면 가닥처럼 젓가락으로 잡힐 듯 눈에 들어 옵니다.

찰랑찰랑 단발머리 소녀의 머릿결 같은 예쁜 봄비도 다녀갔으니, 산길을 더듬어 온 바람에 냉이내음 묻어나고, 강가엔 온화한 새 기운이 피어 오릅니다.

매년 맞는 봄이지만 봄이 주는 생명과 기운은 같지 않습니다. 지나치는 마을마다 사연 담아 흐르는 강물이 예년 강물이 아니 듯, 강 언덕 버들가지의 뽀오얀 움 트는 모양새가 작년의 그것과 다릅니다. 양지 쪽 산수유 노오란 꽃망울도 노상 보던 그 색깔이 아닙니다.

이 봄이 예전의 봄이 아닌 것은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탓이 아닙니다. 지친 일상이 전원의 취향을 잃게 한 까닭도 아니고, 이내 주름진 마음에 세월이 낀 연유만도 아닙니다. 봄은 언제나 그 자체가 새롭고 신비롭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매번, 수십 번  맞이하는 봄이건만 눈에 띄는 새순마다 난생 처음인 듯 경이롭고, 같은 나무, 같은 가지에 맺힌 꽃망울이 어찌 또다시 이토록 짜릿할 수 있을까요.

3월의 강변은 봄이 오는 길목입니다. 3월의 강가에 서면 세상은 평화롭고, 삶은 마냥 한가해집니다. 촉촉히 젖은 흙에서 풍겨오는 향내가 어린아이 적 어머니 젖가슴에서 맡던 내음으로 되새김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온습한 기운으로 막 갈아 입은 바람이 심심하다는 건지 외롭다는 건지, 아닐 것 같지만 그립다는 건지 모를 살가운 몸짓으로 짐짓 기대오지만 그냥 모른 체 합니다. 그렇게 분주하던 날들이, 줄레줄레 끈질기게 따라붙던 잡념들이 갑자기 어디로 숨어버렸는지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일렁이는 물결 따라 눈길이 흐르고 마음이 얹혀 내리고 생각이 이어 잠기면 나는 어느새 착한 사나이가 됩니다. 이게 3월의 강변입니다.

3월의 강변이 이른 아침 이마에 떨어진 이슬 맞은 듯 이토록 신선한데 그 동안 내 마음은 어느 탁한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던가요. 겨우내 옹송그린 내마음, 봄기운 내미는 들길에서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부드러운 물살에 꾸덕꾸덕한 생각의 껍질 씻어 보냅니다. 원망스럽던 이웃의 분노가, 편견이 연민으로 젖어 옵니다. 새순 틔울 생각에 내심 바쁜 느티나무의 우듬지 사이로 따스함이 묻어나는 봄하늘 아래, 나는 이렇게 좋은데, 그토록 힘겨워 하는 그대가 있다니 참 슬픈 일입니다. 너를 아프게 하려면 먼저 내가 아파야 하고, 너를 울게 하려면 적어도 내가 먼저 슬퍼져야 하는 것을….

봄이 오는 길목은 강변으로 이어집니다. 두런두런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물소리 따라 강가로 내려가면 빛나는 햇살 아래 비늘 같은 물결이 눈부시게 맞이합니다. 반사된 볕살이 몽롱한 물안개를 헤집어 놓으면 물푸레나무 가지마다 연록색 움이 고개를 갸웃하고 내밉니다. 가슴에 아름다운 정경이 한 장 한 장 쌓이면 세상 누구라도 기꺼이 사랑할 준비가 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의 손에서 미끄러지고 빠져나가는 그들, 바로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3월엔 강변으로 가자. 거기엔 먼저 온 봄과 이웃에 나눠 줄 사랑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