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에는 자색빛 보석, 백년초 열매 수확이 한창입니다. 날씨가 더 추위지기 전에 수확을 마쳐야 하기에 마음이 바빠집니다. 아침 저녁으로 남해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여서인지 약간의 한기가 가슴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에선 가을 내음이 더욱 물씬 풍깁니다. 절로 "아! 가을이다"라는 탄성이 나옵니다.

아무래도 가을이 정감이 가는 이유는 높푸른 하늘과 깊이가 있는 햇살, 알차게 익어 굽어있는 열매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열매가 던져주는 무언의 교훈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열매는 아무데나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 화사한 꽃이 피고 진 바로 그 자리에 어린 열매가 갖은 시달림을 극복하고 드디어 알찬 열매로 풍성한 결실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를 키우려면 성장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성장 과정은 풀벌레와 비바람과 병충해를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순탄하지 못합니다. 성장만 계속하면 웃자라고 너무 커서 무게에 못 이겨 떨어지고 노출되어 표적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병들기도 쉽습니다. 나무는 성장을 적당히 조절합니다. 그만큼 자연현상과 자연이 주는 의미는 다른 어떤 문명이나 문화 현상보다 더 깊이 젖어들어 내 생활의 내면을 지배합니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꾸준함이요, 진지한 안식의 여유와 성찰인 것입니다. 성장을 멈추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계절이 바로 가을임을 자연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여름에 무성하였던 잎들을 미련 없이 하나 둘 떨어냅니다. 열매를 맺는데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버리는 그 노련한 성숙함은 보이지 않는 지혜의 꽃인 것이죠. 열매가 향과 예쁜 색깔로 눈에 확 뜨이게 분장하는 것은 동물들에게 먹혀 자손을 널리 퍼뜨리자는 심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풋고추가 잎과 같이 녹색인 것은 엽록체 탓으로 어린 고추를 보호하면서 잎이나 줄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스스로도 광합성을 통하여 양분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가 있기에 어느 열매나 어려서는 푸르고 꼭지는 굵습니다. 성장함에 한시도 게을리 하거나 주어진 환경을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웁니다. 비로소 가을에는 생장을 멈추고 엽록체를 스스로 파괴하고 카로틴과 안토시아닌과 같은 붉은 색소들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씨 주머니인 고추를 아름다운 진홍색으로 바꾸고 날 데려가라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붉은 색깔의 고추라 해도 덜 익은 고추를 따는 데는 힘을 주어야 합니다. 익은 고추는 나무가 알아서 꼭지를 떨구는 작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따기가 아주 쉽습니다.

이렇게 자연은 나를 보라는 듯이 계절에 순응하여 변화를 알고, 그칠 줄 알며, 버릴 줄도 아는데 자칭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스스로 통제력을 잃고 그 평범한 삶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온갖 핑계와 게으름을 피우면서 촌음을 무시하고 채우려는 마음으로 깊어 가는지 부끄럽기만 합니다. 계절은 순환과 그 변화를 보이면서 내 마음을 애무하나 칼날 같은 마음은 박제된 인간처럼 탈바꿈을 거부하니까 당연히 그 삶이 팍팍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가을을 안다는 것은 인생을 안다는 것입니다. 곧 여름과 겨울의 성장과 죽음을 넘어선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안다는 것이 됩니다. “욕심은 마치 몸에 상처를 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가을의 물들임이 제시해주는 비움이 채움이라는 이 단순한 진리를 깨우친다면 한결 삶은 청결하고 고아하고 투명해질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 땀 흘린 보람의 결실로 빈 곳간을 채우는 농부, 열심히 공부하여 그 대가로 바라던 학교나 직장에 들어간 학생, 복종으로 오히려 지배하여 따르게 함을 터득하고 슬기롭게 가정을 다스리는 주부, 자신을 희생하면서 묵묵히 이웃을 도와주고 행복을 찾고 좋은 생각만을 키워가는 사람, 누구나 자기의 결실을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며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는 결실의 기쁨을 창조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살며시 찾아온 가을은 허둥대는 우리들에게 “당신은 이 가을에, 결실의 계절에, 거두는 수확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