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쑥날쑥하던 생리가 마침내 끝났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더운 기운이 확 솟아 그 때마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땀을 감춰야 하는 완경 전후 증상도 잦아들고 있습니다. 35년에 걸친 여성 호르몬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역사적 순간입니다. 50여년간 여성으로 살아왔으니 이젠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 살아갈 자유를 얻은 것일까요? 그런데 웬일? 신분 전환의 흥분보다는 마치 오랜 친구를 떠나 보낸 듯 우울합니다. 갱년기의 복병인 우울증. 나 안홍조씨에게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그러고보니 립스틱을 바르지 않으면 어디 아프냐는 인사를 받게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갑자기 내 자신이 쓸모가 적어진 느낌, 황당합니다. 내가 꼭 필요한 인간이라는 자부심이 당당함의 근거였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이들을 낳고 기른다는 게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입지를 정당화시켜준 가장 큰 명분이었음을 뒤늦게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불량 엄마 주제에 이런 느낌을 갖다니.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인생 2모작’이라는 화두는 쌈박합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삶의 방식과 지식으로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자는 말에 백번 공감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과 기술 리필이 어디 커피 리필처럼 간단한 일이던가요? 인생 2모작의 성공 사례들이 환호와 갈채 속에 공개 될 수록 평범한 1모작 인생들의 혈압은 높아집니다. 에라, 2모작 굳이 못하더라도 조금 덜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쁠 것 없지 않을까요? 2모작 인생들을 드높이 칭송하면서 그냥 1모작으로 조용히 사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평소 부족한 덕목인 겸손을 함양해 볼 수 있겠군요. 기어를 아랫단으로 낮추고 걷노라면 전에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완경 뒤, 갱년기의 가장 큰 도전은 인생 후반전에 대한 의제 설정일 것입니다. 생애의 전반부는 성장과 결혼, 일과 아이들 양육이라는 생물학적·사회적·경제적인 의제가 저절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후반전의 생애는 스스로 기획하고 실천하는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완경 뒤, 에스트로겐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워진 한 인간으로서 보고 생각하는 일은 전혀 색다른 경험이 될 것입니다. 때마침 ‘남성갱년기’를 맞아 심리적, 생리적 과정을 겪고 있는 남편과 좀더 가까워져볼까요?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의 격렬한 대치상태로 지내온 지난 오랜 세월의 결혼 생활에 일대 전기가 올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 나이듦을 낡아짐으로만 생각하는 건 공평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중년 이후는 2모작 인생이든, 1모작 인생이든 모든 이들에게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막막합니다. 아무리 큰 소리를 쳐가며 스스로 위로해도 우울증의 안개는 걷힐 기미가 없습니다. 중년 이후의 삶이 오로지 ‘멋진 신세계’가 될 수는 없는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헤매는 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라고.

<안홍조씨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