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나, 나는 가을이면 책을 오히려 덮습니다．책 속에 나열된 얼어붙은 단어들을 가을빛 속에서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독과 자유, 때로는 철학이라는 비현실적인 단어까지도 그곳에 확연한 존재로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잘 정리된 철학자의 인생론보다 철없는 아이의 질문이 진리에 한층 더 가까울 때가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사유(思惟)의 세계는 열 가지 이론보다 한 가지 체험을 통해 더 심오한 빛으로 다가오기도 한답니다．

가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지금, 하던 일 멈추고 창문을 열면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 온갖 의미가 있습니다．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좋아 나는 살아야겠고, 갈색으로 물드는 나뭇잎처럼 애잔해 너를 사랑해야 하며, 얼굴을 핥는 한줄기 바람에서 허무를 느껴 고독과 싸우는 삶의 현장을 되새기게 됩니다．

가을은 생존의 모습을 한 걸음 멈추어 서서 나를 바라보게 하는 계절입니다．뜨거운 태양 아래 앞만 보며 뛰었던 삶의 열기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자연이 만든 공간에서 생활의 리듬을 정리해봅니다．계속 행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며, 잘라 매듭을 지어야 할 문제는 어떤 것인지 간추리는 시간을 갖습니다．한 점의 티끌 속에도 우주의 생명이 깃들여 있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내일의 향방을 모색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농장에 겨울을 나기 위해 푸른잎을 갈색으로, 퉁퉁했던 얼굴을 핼썩하게 줄이며 추운 겨울 준비하는 말없는 백년초선인장을 보며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눕니다．몸을 버리고 버리고 무언의 속삭임으로 자기의 진면목을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액으로 즙으로 나이 많은 어머님 무릎위에, 아님 온 몸을 지탱해지는 건강식품으로 빚어져 많은 이의 입맛을 맞춰줄까, 찾은 이의 희망이 되어 짧은 생애를 마쳐버릴까..

사람도 자기의 존재가 여러 모습으로 달라질 수 있지만, 중요한 건 확실한 모습과 분명한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약하면서도 강하고 험쌍굿게 생겼으면서도 부드러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자존(自存)의 '백년초'의 의미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이 선택한 사랑과 일의 세계 속에서 그 이름과 직위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자신의 뜻과 달리 누군가의 위력에 눌려 꿈을 펼치지 못하는 건 아닌지, 나약한 습성에 길들여져 자기의 날개로 날지 못하는 건 아닌지 성찰하는 자리에 앉습니다．이 계절에 창가에 앉아 향기로운 차 한 잔을 마시며, 우수와 달관에 젖어보는 모습은 어느 철학자의 사진보다도 진지하고 아름답습니다．

철학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思考)를 갖는 것’이라 합니다．이 가을이 가기 전, 나는 집 근처 선인장 밭을 거닐며 하나의 모티브를 건져야겠다는, 철학자를 닮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