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무더위가 어제 입추가 지나면서 거짓말처럼 선선함이 느껴집니다. 그동안 무더위에 편이 쉬는 사람들은 집안에서건 어디서건 훌훌 벗고 몸을 식히면 되지만, 무더위 속에서도 격식을 찾아 일에 나선 사람들은 옷을 차려 입고 사람을 만나느라 무척 힘들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위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선조 때 비서실에 근무하던 이항복은 자신의 장인인 도원수 권율이 관복 안에 제대로 옷을 입지 않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느 무더운 날 어전회의 중에 긴급 제안을 합니다. “날이 너무 더워 정신마저 혼미해지니 이래서는 제대로 회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관복과 관모라도 좀 벗고 회의를 진행하면 어떻겠습니까.”  

높은 용상에 앉아 있지만 덥기야 마찬가지였을 선조도 못이기는 체 이를 윤허하니 신하들이 모두 반기며 관복과 관모를 벗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권율만이 관복을 벗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습니다. 임금 선조도 용포를 벗었는데 도원수만 옷을 벗지 않고 있으니 “임금이 벗으라 했는데 어찌 벗지 않는가” 하고 채근하니 얼굴이 홍당무가 된 권율도 마지못해 관복을 벗었는데 요샛말로 팬티에 러닝 차림이 아닌가요.

권율이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서 있고 선조와 대신들 모두 당황해하는데 이때 이항복이 재치 있게 날립니다. “전하. 도원수가 워낙 청빈해 집안살림이 넉넉지 못해 옷도 제대로 못해 입고 다닌다 하옵니다. 도원수의 딱한 처지를 어여삐 여겨주소서.” 그제야 이항복의 장난기를 깨달은 선조는 파안대소하며 비단과 무명을 하사했고 그날 이후 권율은 아무리 찌는 삼복더위에도 의복을 다 갖춰 입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가 가을인가라고 물으면 절기상으로는 입추(立秋)에서부터 입동(立冬)까지랍니다. 그렇다면 입추에서 보름이 더 지난 오늘 처서(處暑)는 분명 가을인 것입니다. 그런데 처서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글자로 보면 서(暑)는 이미 지나간 소서(小暑)와 대서(大暑)를 작은 더위와 큰 더위로 푸는 것에서 보듯 분명 더위를 뜻한다고 알겠는데, 그럼 처서는 어떤 더위를 말하는 것일까요. 찾아보면 여름이 지나 더위도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불렀다고 풀이하고 있는데 글자만으로는 그런 뜻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처(處)라는 글자에는 ‘휴식하다’, ‘머무르다’, ‘돌아가다.’ 등의 뜻이 있네요. 아 그렇구나. 처서라는 이름에는 더위가 쉬거나 머물거나 돌아간다는 뜻이 들어 있었군요. 아니면 더위를 다른 곳으로 보내어 처리한다는 뜻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뜻이든 간에 처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 계절의 분기점입니다. 이맘때 농촌에서는 나락이 크는 소리에 놀라 개가 짖는다고 하는데, 그만큼 한창 내리쬐는 땡볕이 따갑지만 공기도 뽀송뽀송해지면서 긴 햇살이 결실을 촉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논과 밭의 작물이 결실기로 들어서는 것과 때를 맞추어 옛날 조선시대 임금들도 초복(初伏)부터 처서까지의 관례적인 휴가(?)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국정에 복귀했다고 합니다. 임금의 휴가는 날수로 치면 대략 40일이 채 안 되는 기간인데, 한여름 너무 더우면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학문 높은 신하들과 경전을 토론하는 경연(經筵)을 중단하고 업무보고도 받지 않는 관례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궁궐의 여름휴가도 어제로 끝입니다.

아무튼 사상 최악이라는 불볕 가마솥 더위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일단 절기상은 가을이고 달력은 곧 9월이 됩니다. 9는 가장 큰 양수, 가장 높은 수이기에 예로부터 신성한 숫자이며 가장 좋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왕이나 황제가 거하는 궁궐은 9를 기본단위로 만들어졌습니다. 중국 자금성의 가장 큰 전각의 높이, 황성의 정문인 정양문(正陽門)의 높이, 둥그런 지붕으로 유명한 천단 기년전의 높이가 모두 9장9척이고 회음벽 바로 옆의 오래된 측백나무는 9마리의 용이 함께 승천하는 것 같다는 뜻에서 구룡백(九龍柏)으로 불립니다. 9가 겹치는 9월9일은 중양절(重陽節)이라고 해서 이날을 중요하게 쇠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자동차 번호판도 낮은 숫자로 시작해 9로 끝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업이나 인생이 다 잘 돼가는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9월은 우주의 시간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때인 만큼 단순히 숫자의 의미를 넘어서서 시간의 변화를 바로 보고 삶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9월은 코스모스가 피는 때이고, 코스모스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가을을 알리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은 도시의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이라며 코스모스가 많이 피는 9월은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9월, 오세영)고 9월의 가슴을 토해냅니다.

그러기에 이제 다거오는 9월에는 또 다른 시인처럼 강가에 가서 흐르는 물을 보며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을 가만히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9월이 오면, 안도현)